공산성 → 송산리 고분군
1. 공주시(公州市)
충청남도 중심인 공주의 허리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다.
흐르는 금강 사이로 '백제 큰 다리'가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강 건너 밤하늘을 수놓은 공산성의 불빛은 한강에서 수원화성을 보는 느낌이다.
백제 개로왕이 사망한 후, 문주왕이 천도한 웅진(공주).
문주왕은 백제의 부흥을 꿈꿨지만, 권력다툼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금강은 역사를 굽어보듯 서럽게 푸르다.
.
공주는 삼국시대에는 웅진(熊津)으로 불렸으며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538년 백제 성왕은 수도를 사비 (현재의 부여군)으로 옮겼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주라고 불렸다. 고려 태조 23년 처음으로 공주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고, 983년(고려 성종 2년) 처음으로 십이목(十二牧)을 두었는데 이 때, 공주에 공주목(公州牧)을 두었다. 이는 현재의 충남 지역에서는 유일한 것이었다.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나주로 피란할 때, 곰나루를 건너 공주에 이르러 수일을 머물렀다.
조선 전기에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 4대 목 중 하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공산성에 명나라 군의 지휘부가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에 공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이 공주에 이전됨으로써 충청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일시 몽진하였다. 이괄의 군이 개성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피란을 왔다.
1602년부터 1895년까지 충청도 감영 소재지로서 충청도의 중심지였다.
1894년 전봉준의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대전투를 치렀으나 패하여 동학혁명은 실패하였다.
1896년 8월 4일 충청도를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분리하면서 충청남도의 수부(首府)를 공주에 두었다.[1]
1931년 4월 1일 공주면이 공주읍으로 승격하였다.
1932년 충청남도청이 공주에서 인근의 대전군으로 이전하였다.
1986년 1월 1일 공주읍이 공주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1일 공주시와 공주군 일원을 통합하여 도농복합형태의 공주시가 설치되었다. (11면 8동)
1995년 3월 2일 유구면이 유구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10면 8동)
2012년 7월 1일 장기면 전역과 의당면, 반포면 일부가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었다.
2. 공산성
□ 관람시간 : 09:00~18:00
□ 관람요금 : 어른 1,2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600원
□ 공산성 안내소 : 041-856-7700
□ 수문병 근무 교댜식
- 4월14일 ~ 11월4일 (매주 주말, 단 6월~8월 제외)
- 오전 11시 ~ 오후 17시
- 행사참가신청 : http://공주수문병.com/default/
백제의 고도 공주의 상징,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전열을 재정비하고 패색 짙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장으로 5대왕 64년의 백제 웅진사 써내려간 곳이다. 고구려에 맞서 영토를 지키고, 중국과 일본 등 외국과 활발히 교류한 해상왕국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백제. 그러나 475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도성인 한성이 함락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이 전투에서 개로왕이 전사하자, 개로왕의 뒤를 이어 백제 제22대 왕으로 즉위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면서 공산성은 백제의 도성이 된다.
백제 웅진의 64년 도성이 된 공산성은 백제 이래 천년 이상의 세월동안 세월과 시대의 변천을 겪어 온 역사의 장으로 그 세월만큼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공산성 성내에는 백제 때 건물지를 비롯하여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산재해 있다. 조선 인조대왕의 일화가 전해지는 쌍수정 아래 광장은 백제의 추정 왕궁지. 성의 동쪽에 있는 임류각지의 발굴로 성내에 백제왕궁지가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백제역사지구, 공주에는 총 2곳의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두번째 수도 모습을 간직한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잠들어 있던 송산리 고분군.
그 중 공주를 아우르고 있는 공산성을 먼저 둘러보았다.
가장 적은 시간이 소요되는 '공산성 한바퀴 3번 코스'로 둘러보았다.
실제로 30분 이상인,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공산성 내부에는 현재까지 발굴조사 중인 곳이 많아,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금서루(錦西樓)
매표소를 거쳐 공산성을 들어가면 금서루가 관광객을 가장 먼저 반겨준다.
금서루는 4곳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온전하지 못하고역사적 자취만 남아있었다.
이를 1933년에 복원하였고, 지금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맞이터가 되었다.
'공산지'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공산정(公山亭)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공북루의 성곽길을 따라 올라가면 공산정이 나타난다.
과거, 이 누각은 유신대, 전망대 등으로 불렸다.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공산정이라 명명되었다.
서북쪽 산마루에 있는 공산정은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교 등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해질무렵 금강의 모습과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공산정에 올라 한 바퀴 돌아보면 현재의 공주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요새로 사용된 공산성을 두 눈에 담을 수 있다. 3
얼음창고 [石氷庫]
조선시대 때 석빙고 역할을 한 곳이다.
한겨울 맑은 금강물이 꽁꽁 얼면 그것을 떼어내 왕겨에 싸서 석빙고에 저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약재를 보관하거나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누에의 알을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해주는 잠종저온 창고로도 사용되었다.
연지(淵池)
만하루와 함께 어울러져 있는 것이 백제시대의 연못이다. 발굴되기 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다.
공산성에는 총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 발견된 연못은 왕궁터의 연못과 이곳 연못 총 2 곳이다.
왕궁터의 연못이 원형이었던 것과 달리, 만하루 옆 연못은 각이 져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가지런하게 단이 생기도록 돌을 쌓았다.
위는 넓고 아래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구조를 띠고 있다. 그래서 연못을 내려다 보면 마치 석탑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다.
연못 옆에 있는 만하루는 조선후기에 건축된 누각이다. 앞으로 흐르는 연못을 감상하기 좋다.
영은사(靈隱寺)
영은사는 세조 4년(1458)에 지은 사찰로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전해진다.
진남루(鎭南樓)
진남루는 공사성의 남문이며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시대에 석성(石城)으로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건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三南)의 관문이었다.
왕궁터의 흔적
백제의 왕궁터는 쌍수정 앞에 있다. 왕궁터를 발굴하게 된 계기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산성 안에 있었던 임류각이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에 따라 1985년에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현재 울타리가 쳐져 있으며, 이 왕궁터에서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기와의 끝을 장식하는 수막새가 발굴되었다. 백제 양식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건물의 높은 위상을 보여준다. 또한 기와도 다량 발견되었고 그중 왕궁을 뜻하는 궁(宮)자가 새겨진 것도 있다.
이 왕궁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은 건물터 앞에 있는 거대한 연못이다. 연못은 발굴 당시에도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연못의 형태를 보면 뒷면이 넓고 바닥면이 그보다 훨신 좁은 원형이다.
이 연못이 백제의 어느 왕조 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에는 동성왕 때 연못을 파서 진기한 새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이 연못은 물이 채워져 있지 않은채, 원형만 보존하고 있다.
쌍수정 (雙樹亭)
관직을 하사 받은 나무
왕궁터 앞에 쌍수정이라는 정자와 사적비가 있었다. 이곳에는 원래 쌍수(雙樹)라 불리는 나무가 있었다.
쌍수는 한문 뜻 그대로 '두 그루의 나무이다.
조선시대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까지 파천했고, 이 곳 공산성에서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리며 지내고 있었다.
성에 들어온지 5일째 인조는 언제올지 모르는 소식을 기다리며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에 몸을 기대었다.
그때, 마침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너무나 기뻐했던 인조는 기대고 있던 쌍수에 정3품 통훈대부라는 관직을 주고, 이곳을 '씽수산성'이라 하였다.
이후 영조대왕때 쌍수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삼가정(三架亭)'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정자는 여러차례 보수되었고, 고종황제 때 1930년, 다시 정자를 세우면서 이름을 '쌍수정'이라 하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3. 송산리 고분군
송산리 고분군 전시관이 2019년 7월 31일까지 전시개선사업에 따른 임시휴관중이다.
모형전시관이 임시휴관 중이기에, 무령왕릉 출토 유물과 6호분의 사신도 복제본을 볼 수 없다.
입장료는 받지 않기에 가볍게 고분군만을 보기에 좋다.
송산리 고분군은 6개의 고분과 무령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6개의 고분은 일제시대 때 도굴되어 주인을 알 수 없다.
무령왕릉은 5,6호분 배수로 사업중 우연히 발견되었고, 그 형태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로 무령왕릉의 보존을 위하여 일반 관광객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사신도가 있는 6호분과 다른 고분도 출입을 금하고 있다.
전시공사중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고분군 옆 웅진백제역사관을 함께 방문하길 권한다.
퍼즐맞추기, 의복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기에, 가족들과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다.
송산리 고분군
웅진백제역사관
4. 식당
공주의 대부분 맛집으로 추천된 식당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영업을 한다.
수요미식회에 나온 '전국 5대 짬뽕, 동해원'에 방문하고 싶었지만, 일요일에는 영업을 하지 않았다.
매향
메밀 100%로 만든 막국수를 주문하여 먹었다.
구수하고 풍미와 적당한 탄력이 매력적이었다. 양은 성인 여성이 먹기에 살짝 많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막국수만 먹기에는 맛이 단조로운 느낌이다. 편육무침과 함께 먹는 것을 추천한다.
2인 기준으로 막국수 1그릇과 편육 1접시면 맛있게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매향의 메밀면은 시중에 있는 제품과 확실히 달랐다.
가게 내부에 있는 큰 멧돌로 살아서 그런지 구수한 맛이 더 살아있었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탄력이 살아있었다.
반찬으로 나오는 빨간색 무김치도 별미였다. 매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지만, 메밀면의 구수한 식감을 돋아 주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따뜻한 물이었다. 차가운 속성을 가진 메밀면을 먹은 후, 가볍게 따뜻한 물로 입안을 적시면 그 맛이 더 배가 되는듯 하였다.
웨이팅도 길지 않았고 식사도 깔끔하였기에, 공주를 방문하게 된다면 재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주차할 곳이 충분하지 않기에, 건물 주변 또는 공영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을 추천한다.
□ 영업시간 : 월~일 (11:00~15:00)
□ 위치
원진 노기순 청국장
기대하지 않고 방문한 곳인데, 이번 여행에서 깄던 식당 중 가장 좋았다..
'한식대첩 시즌4' 수상 현수막과 함께 아름다운 한옥이 발길을 잡는다.
청국장 정식은 11,000원으로 비싸보이지만, 함께 나오는 반찬을 생각하니 적당한 것 같다.
게다가 밑반찬 맛도 마구잡이 식으로 요리된 것이 아니라, 입맛을 돋우기에 참 좋은 에피타이저 같았다.
메인메뉴인 국산콩으로 만든 청국장은 구수하였고 깔끔하였다.
청국장 특유의 오래되고 퀴퀴한 역한냄새도 나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 영업시간 : 매일 11:00~22:00
□ 관련기사 : 한식대첩4 청국장의 명불허전 ‘원진 노기순 청국장’
□ 가격정보
- 청국장 정식 : \ 11,000
- 묵은지찜 정식 : \ 13,000
□ 위치
'Jouney > 충청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안] 신두리정원캠핑장 글램핑 솔직후기(시설 / 비용 / 장단점 / 명당) (0) | 2021.10.18 |
---|---|
[안면도] 서울 근교, 바닷바람 시원한 곳 (0) | 2019.06.25 |
[안면도] 서울 근교 가볼만한 '낙조 명소' (0) | 2019.06.24 |
[예산] '동양 최대 402m' 예당호 출렁다리 (0) | 2019.06.18 |
[부여]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扶餘) (0) | 2019.06.17 |